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프 2세 (문단 편집) == 평가 == ||<-4><:> [[파일:Territorial_Conquests_of_Philip_II_of_France.png|width=100%]]|| ||<-4><:>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재위 기간내에 확보한 영토[* 보다시피 앙주 제국이 가져갔던 프랑스 내 영토를 죄다 프랑스 왕령 혹은 우호적인 제후령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 >'''"약삭빠르고 예리하고 교활하고 수완이 뛰어나며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수능란한 통치자."''' >----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EC%8A%A4_%ED%99%89%ED%82%A8%EC%8A%A4_%EB%8C%80%ED%95%99%EA%B5%90|존스 홉킨스 대학(The Johns Hopkins University)]] 교수 J W. Baldwin(1929~2015)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정치가이자 라이벌 [[리처드 1세]]에 가려진 진정한 만능왕. '''오늘날 [[프랑스]]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동맹한 대가로, 명목상으로나마 서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랑스]]가 처음으로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용맹함과 낭만적인 성격 덕분에 여러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국가 내정은 휴버트 월터에게 떠맡긴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정치적 술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프랑스 카페 왕실 직할지를 넓혀 왕권을 강화시키고, 프랑스내에서의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전쟁에서도 비록 그리 많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빈 전투와 같은 굵직한 결정적 전투에서 으레 승리를 거두며, 거의 패배하지 않았던 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내정 분야에 있어서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기에 이는 이후의 100년간 카페 왕조가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 때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은 르네상스 시기에도,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에도 상승했고 산업혁명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옆 나라 독일이 14, 15세기가 될 때까지 계속 깡촌으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땅만 넓었지 인구상으로는 프랑스의 3분의 1도 안되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국가였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이탈리아만 신경썼다고 까는데 교황이라는 명분적 중요성은 물론 경제적 부유도를 따졌을 때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로 부유한지라 절대 놓쳐선 안 될 땅이었기에 이탈리아에 집중한 것이었다. 즉 개살구같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들 중에서 그나마 알토란 땅이 이탈리아였던 것.] 필리프 2세 이전까지의 프랑스와 달리 꽤 강력한 황권 덕분에 대외적인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뿐. 지금의 [[독일]] 인구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현대 독일의 위엄쩌는 인구는 14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독일 지역의 상공업 덕분이다.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 독일의 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하는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불과 20% 정도 증가하는데 그친다.[* 그후 [[30년 전쟁]] 때문에 독일 인구가 줄었지만, 19세기에 다시 독일 인구가 프랑스를 추월했다.] 필리프 2세가 처했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프랑스내 주변에는 강대한 [[잉글랜드]]가 위대한 왕인 [[헨리 2세]]와 뛰어난 전쟁군주인 [[리처드 1세]]의 통치를 받으며 필리프 2세와 프랑스를 거침없이 압박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뛰어난 개인적인 정략과 계략, 정교함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법한 수준의 역대급 권모술수를 가졌으니,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까다로운 적수인 [[헨리 2세]]를 제거한 것을 비롯, 남프랑스의 대영주 가문인 툴루즈 가문을 이용하여 플랜태저넷과 카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강대한 [[아키텐]] 가문을 견제했고, 그러면서도 이러한 아키텐 가문의 인사들을 선동하여 헨리 2세가 죽고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에 종군하자마자 잉글랜드령 남프랑스를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상대적으로 약한 일대의 프레보들을 제거하며 다량의 토지를 왕령지[* 영어로 Royal Domain. 중세~근세 유럽 지도들의 비고란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에 입수함에 따라 그 자신의 군사력을 증진,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영주 세력들의 영지를 강압적으로 전봉시키거나 반발할 경우, 무력으로 짓밟아 제거하면서 자신의 직할지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으며[* 플랑드르 지역의 영주였던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이에 반발하여 부빈 전투의 단초를 제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리모주 자작이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하여 끝내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성전의 배후에 필리프 2세가 있었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전쟁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리처드 1세를 포함한 동 시대의 명장들에 비해서 필리프 2세는 전술적으로 특출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기본적으로 상대하는 적수에 맞춘 대국적인 견지와 전략적 재능이 뛰어났다.[* 오히려 군주로서 (큰 단위의 전략 능력에 대비되는 의미의) 일신의 무용이나 작은 단위의 전술 능력이 너무 높으면, 거기에 도취되어 본인이 무(武)만 신경쓰면 되는 일개 사령관이나 장수가 아닌, 문무를 모두 통할하는 '''군주'''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례가 ([[항우]]와 리처드 1세처럼)역사적으로 꽤 보였다.] 강대한 플랜태저넷 왕조 앙주 제국을 무너뜨림에 있어서도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닌, 혈통과 클레임 명분을 이용하여 지방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플랜태저넷 왕조에 반항하게 만들며 자신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조성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끝내 살라딘과의 승부를 내지 못하고 프랑스로 복귀했을 때에는 리처드 1세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와의 전면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끝내 [[차도살인]]의 형식으로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유도했고,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플랜태저넷 가문에 대한 전략을 전면적인 공세로 순식간에 전환하면서 이제 막 즉위한 [[존 왕]]의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내고, 잉글랜드의 프랑스 대륙령 영토를 거의 모조리 순식간에 집어삼킨 것은 필리프 2세 본인의 전략적 식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유리한 위치에서 결전을 강제했다고는 하나 애당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순신]] 등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분명한 명장의 자질이다.[* 춘추시대 말기의 병법가 손자는 명장의 유형을 2개로 정리했는데, 첫 번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이기는 장수고, 2번째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라고 명했다. '''이 중에서 손자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를 더 높게 평가했다'''.] 게다가 샤또 가야르 전투에서는 7개월 간 공성 준비를 하여 단 1개월만에 난공불략인 그 샤또 가야르를 함락하였고, 수적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열세에 있었던 [[부빈 전투]]에서조차도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 연합군을 격파하며 필리프 2세는 전술적으로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모자란 사람은 아님을 증명했다. 리처드 1세의 정치, 외교적 능력이 일반의 오해와 달리 뛰어났다는 것이 재조명되면서 이런 리처드 1세를 상대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 데 일조한 필리프 2세의 정략적 능력이 매우 대단했음이 재차 드러난다.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싸움만 잘하지 외교, 정치에서 무능한 이를 편하게 상대해온 것이 결코 아니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말 수가 적고 쾌활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파고들어 장악하는 능력이 타의 추총을 불허했다고 하는데 '타인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줄 아는 남자', '왕을 사랑하는 만큼 왕도 그들을 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왕의 사랑을 두고 흥미진진한 싸움을 벌였고 어떤 이는 누가 가장 왕과 사랑이 깊은지 궁금해 했는데 이로써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의 달콤한 미소와 명량한 표정은 그의 엄숙한 모습을 보고 겁 먹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재빨리 허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